시쳇말로 감정 노동자란 말이 있다. 말투나 표정, 몸짓 등 드러나는 감정 표현을 직무의 한 부분으로 연기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일을 수반하는 노동을 말하며 항공기 승무원, 홍보 도우미, 식당 웨이터, 콜센터 상담원, 텔레마케터, 은행 창구 직원 등이 이에 속한단다.

소위 이러한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분들이 겪는 애로사항을 듣고는 저러한 몰지각한 행태를 보이지는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서 나는 전화, 인터넷 등의 고장 신고나 서비스를 요청하는 전화를 할 때면 항상 '수고하십니다!' 라는 말을 먼저 건넨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 이후 전화를 받는 아가씨(?)의 목소리가 한결 가벼워지는 듯 한 느낌을 받곤 했다. 그러면서도 솔직히 그러한 전화를 할 때면 심사가 영 편치 않음은 부정할 수 없다. 사용에 문제가 생겨 AS를 요청하는데 좋은 마음이 들 수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부드러운 말투로 상담을 하곤 했다.

한 번은 갑작스레 부동산 매매계약이 한 건 이루어졌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인터넷을 사용하려니 불통이다. 전에 몇 번씩 겪어보았던 일인지라 컴퓨터를 끄고, 모뎀과 공유기 전원도 껐다가 다시 켜기를 몇 번 해봐도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는 것이다. 공인중개사 협회에서 제공하는 전산 양식을 이용해야 하는데 인터넷이 되질 않으니 어찌할까?

할 수 없이 묵은 필기용 계약서를 찾아서 볼펜으로 계약서를 써 주자니 불편도 할 뿐만 아니라 창피스럽기도 했다. 명색이 공인중개사란 사람이 컴퓨터도 잘 사용하질 못해서 손으로 계약서를 써 주느냐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객분께 사죄를 한 후 며칠 후 전산 계약서로 교체해 주기로 하고 그 날의 계약은 마쳤다. 그러고 나서 전화국에 AS 요청 전화를 내었더니 상냥한 여직원의 의례적인 안내 멘트가 나왔다. 신경질은 났지만 어쩌겠는가! ‘수고합니다!' 라는 말을 건넨 후 증상을 이야기 했더니 또 시작되는 멘트는 항상 그 말이 그 말이었다. 그래서 미리 선수를 쳐서 이렇게 이렇게 해봐도 안 되어서 전화를 내었으니 빨리 조치해 달라고 이야길 했더니 오늘은 안 되겠고 내일 오전이면 어떻겠느냐고 해서 내일로 약속 시간을 잡아서 AS 조치를 받았다.

그런데 AS를 받은 후 종전에 없던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터넷 접속 PC 대수 제한이라는 팝업창이 뜨기 시작하는 것이다. 왜 이런가 싶으면서도 접속 PC 변경 버튼을 누르면 그런대로 연결이 되기에 또 그냥그냥 사용해 왔다. 그런데 그저께 부터는 이마저도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안내 팝업창에 나타난 1577 전화로 전화를 걸었더니 시외통화료가 부과된다는 멘트 이후에 상담원이 상담중이서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멘트가 나왔다. 그 이후로는 기다리시는 동안 안내한다며 부가세신고 방법. 집 전화 무한요금제, 지상파드라마 올레tv, 휴대폰 분실 시 대처방법, 시청연령 제한방법 등 홍보성 멘트만 계속 나오질 않는가! 안내 멘트를 4회전이나 듣고서는 안 되겠다 싶어 100번으로 전화를 내었더니 또 의례적인 상냥한 말투의 여직원 음성이 들렸다. 얼마나 성질이 나던지 “다른 말 다 그만 두고 1577 전화로 안내멘트 듣는 동안 시외통화료가 부과되느냐 안 되느냐를 먼저 따져 물었다. 맞는지 안 맞는지는 몰라도 상담원이 연결 될 때 까지는 통화료가 부과되지 않는단다. 내 목소리가 퉁명스러워 질 수 밖에 더 있는가! 그러자 그 여직원의 목소리도 울상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KT에서 설치 해 준 모뎀과 공유기를 설치했는데도 PC 대수 제한에 저촉된다면 미쳤다고 돈 주고 공유기를 설치할까?

또 다시 내일 오후로 AS 시간을 잡은 후 마누라와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주차하는 도중에 또 마누라의 운전 관련 잔소리가 시작되기에 짜증을 내었더니 마누라 왈 “왜 인터넷 안 되는 것을 갖고 나한테 화풀이 하느냐”면서 볼멘소리를 한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그러면서도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비교해서 보다 논리적이다 라고 평가하는 것은 감정을 절제할 줄 아는 이성 때문이라고 한다.

요즈음 사소한 일에도 분을 참지 못하고 사고를 치는 사람들이 많다. 보복운전, 층간 소음 및 주차 시비로 칼부림하는 사람들……. 예전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 인 것이다.

왜 그럴까?

복잡다기한 현 사회에서 너무도 많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기 때문이 아닐까?

한 발 물러서는 양보의 미덕과 조금은 느린 삶을 살 줄 아는 지혜를 가질 수 있다면 세상이 이렇지만은 않을 것인데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도 이번의 경우에는 나도 사실 화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럴 때는 꼭 분을 참지 못하고 욕설을 하는 이용 고객만 잘 못하는 것일까? 상담원이 그렇게 부족하여 생기는 문제라면 적정한 수요를 파악하여 상담원을 늘려야 할 것이 아닌가! 아니면 계속 되풀이되는 홍보용 멘트만 틀어놓고 업무는 뒷전인 상담원의 관심부족 탓인지……. 어떻게 보면 말로써만 입막음을 하려는 기업들의 지나친 이윤추구 경영 때문은 아닐까? 진정한 고객의 불만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시정하려하지는 않고 그저 그런 뜨뜻미지근한 사고로 흔히 말하는 감정 노동자들을 방패삼아 장사 잇속만 챙기려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오늘은 감정 노동자도 아닌 애꿎은 마누라가 나의 짜증받이가 된 날인 것 같다.

진정으로 고객을 위하는 기업들의 자세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