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을 위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와서 어떤 이야기를 할까 고민하다 수첩에 정리한 게 시작이다. 사람들에게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것’에 대해 얘기해보자는 생각으로 평소 생각하고 있던 화두를 쭉 적어봤다. 예를 들면 ‘약자에게 약하고 강자에게 강하라’, ‘스스로의 운명을 가치 있게 생각하라’ 같은 말을 늘어놓은 다음 카테고리별로 묶으니 여덟 가지로 추려지더라. 자존, 본질, 고전, 견(見), 현재, 권위, 소통, 인생이 그것이다.

‘소통’이다. 요즘 내 화두 중 하나도 ‘듣는 힘은 정말 중요한 능력’이라는 것이다. 4050 남성에게는 정말 듣는 힘이 필요하다. ‘듣는 힘’이라고 한 것은 체력, 정신력, 독해력처럼 ‘키워야 하는 능력’임을 말하고 싶어서다. 4050 남성은 이미 어느 정도 세파를 헤쳐왔고, 성취도 이뤘고, 본 것과 경험한 것이 있어서 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대해 섣불리 판단하기 쉽다. 자신만의 생각에 갇히지 않기 위해 특히 잘 듣는 힘이 필요한 것이다.

마음을 열고, 들으려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가령 젊은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하다고 “말 좀 해봐!”라고 한다면 이건 듣는 힘이 없는 거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한다. ‘듣는 힘’을 갖춘 사람은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식당에 가서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면서 “어제 뭐하고 놀았니?”, “요즘은 어떤 영화가 재밌니?” 하고 먼저 묻는다. 그러고 나서 적극적으로 그들의 얘기에 맞장구치며 “아, 그렇구나!”라고 해야 한다. 아는 얘기가 나왔다고 해서 자신의 이야기로 끌어와서는 안 된다.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방법에는 내가 직접 경험하는 것과 간접 경험하는 것이 있는데, 간접 경험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대화를 통해 얻을 수도 있다. 요즘 20대 여성의 이야기를 들으면 ‘화장품’, ‘강남역’, ‘남자친구’ 등의 얘기가 나온다. 듣는 것만으로 20대의 인생을 내 삶에 흡수시킬 수 있는 것이다. 듣다 보면 자연히 간접 경험으로 얻을 수 있는 생각의 지평이 넓어진다. 세상과 나의 관계가 생기고 가족, 후배와의 관계도 좋아지며 자기 존재감도 더 커진다.

하나는 '다이어리'다. 매해 연초에 다이어리 하나를 마련해 매일매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실만 기록한다. 20년 가까이 써온 다이어리를 전부 가지고 있어 날짜만 찾아서 보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일하는 노트’다. 회의 내용이나 카피 작업한 것 등을 적는다. 이와 관계없이 노트 뒤쪽부터는 책에서 본 좋은 문장, 기억에 남기고 싶은 문장을 적는다. 마지막으로 '글이나 강연을 준비하는 노트'가 있다. 일상에서 떠오른 이것저것을 적은 것인데, 이 노트의 내용이 <책은 도끼다>, <다시, 책은 도끼다>의 바탕이 됐다.

책을 읽다가 좋은 대목이 나오면 연필로 밑줄을 긋는다. 그런 다음 타이프를 쳐 문서 파일로 갖고 있거나 출력해서 읽는다. 읽고 나서 정말 좋은 건 벽에 붙여두고 보기도 한다.

사무실에는 되도록 짐을 두지 않으려고 한다. 책도 대부분 집에 두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많이 갖고 있진 않다. 방 하나에 서가를 두고 제일 좋아하는 책, 새로 들인 책, 내가 쓴 책, 대학 시절 읽은 책 등으로 분류해 두었다. 별도의 색인은 없지만 필요한 책을 찾는 데 어려움은 없다.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동받는 것이다’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감동받은 문장은 어느 책에서 봤는지 한두 번만에 찾을 수 있다.

인문학이라는 말보다는 ‘인문적인 훈련, 촉수’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게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행복의 정도가 다르다. 인문적인 훈련을 한다고 해서 객관적인 조건이 바뀌지는 않는다. 갑자기 연봉이 오르지도 않고, 애들 성적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아내가 상냥해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똑같은 아파트에 살아도 그곳을 오가는 내 시선을 바꿀 수 있고, 자녀와의 대화가 즐거워 질 수는 있다. 객관적인 조건을 바라보는 주관적인 해석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주어진 조건 속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인문적인 훈련이 안 된 사람은 연봉이 두 배로 올라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책은 물론 영화나 친구와의 좋은 대화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내가 감동받고 나면 상황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영화 <아메리칸 뷰티>에서 검은 비닐봉지가 바람에 날리는 장면을 보며 ‘이게 누군가에게 춤이 될 수 있구나!’ 하고 공감하거나, 고은의 시를 읽고 ‘하늘 색깔이 이렇게 보일 수도 있구나!’ 하고 감동을 얻으면 된다. “달은 어디에나 있지만 보려는 사람에게만 뜬다”라는 법인 스님의 말씀처럼, 하늘에 떠 있는 같은 달을 보고 누군가는 아름답다고 느끼지만 수많은 사람은 달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다.

<여덟 단어>에 나온 키워드 중 ‘견(見)’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많이 보려고 하지 말고 하나를 제대로 깊이 있게 봐야 한다. 세밀하게 보고 시청(視聽)이 아닌 견문(見聞)을 하라. 깊이 보고 들어야 한다. 격물치지(格物致知)라고 했다. 물건 하나를 제대로 들여다보면 세상의 이치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을 봐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봐야 하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생각을 정리하는 빠른 방법이기 때문이다. 말로 하는 것은 글을 쓰는 것보다 속도가 빠르다. 듣는 이를 설득해야 하니까 생각의 밀도도 높다.

가장 중요한 건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재미있는 내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기 전 대상의 위치를 잡듯, 내가 하고픈 말의 윤곽을 미리 잡아놓고 말을 해야한다. 내용과 순서를 정리해서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말해야 매력적인지를 고민해봐야 한다.

다양한 세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관심사를 넓혀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건 나이들어 외로워지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일단 따라 해보는 것도 좋다. 그리고 ‘해보니까 이렇더라’ 하는 피드백을 주자. 주위 친구 중에서도 재미있고 나와 관심사가 다른, 예를 들면 책이나 영화를 많이 보며 젊은이들과 소통을 잘하는 친구를 만나 그의 장점을 배우는 것도 방법이다.

간접 경험이 정말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혜를 얻으려면 경험을 많이 해야 하는데, 우리는 하나의 인생밖에 살지 못한다. 그래서 더 많은 간접 경험을 해야 한다. 소설은 영화보다 상상을 통해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 또 훌륭한 소설은 스토리가 아니라 작가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대심문관’의 장을 통해 자신이 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개인마다 취향이나 독서 이력이 다르기 때문에 섣불리 책을 추천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4050 남성에게는 손철주(미술평론가, 출판인), 오주석(미술사가), 김훈(소설가, 언론인) 같은 작가의 책을 추천하고 싶다. 사고를 유연하게 해주고, 생각의 지평을 넓혀줄 것이다. 음악, 미 술, 시, 건축 등 예술 분야의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다.

감동이나 행복을 느낀 그 감정 상태를 계속 이어나 갈 수 있다면, 성인이고 득도한 사람일 것이다. 귀가하는 도중 ‘달이 아름답다’고 느꼈는데, 막상 집에 들어가서는 화를 냈다고 해서 그때 느낀 감정이 거짓은 아닌 것이다. 그 순간의 아름다움이 있고, 그 감정을 지속하려는 노력은 했다. 그래서 인간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불교 용어 중 ‘점수(漸修)’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차츰차츰 닦아나간다’는 뜻이다. 다들 ‘이렇게 살아야지’ 하다가 틀어지고, 정신 차리고, 또 이를 반복하는데, 이런 노력이 사람을 만드는 것 아닐까?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태도이고 의지라고 생각한다. 행복하겠다는 태도나 의지가 없는 사람은 조건이 바뀌어도 행복하지 않다. 끊임없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게 행복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사람은 돈이나 승진처럼 주어진 조건 속에서 행복해지는 게 아니다. 행복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이기에 행복하고자 하는 삶의 태도가 중요하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앞에서 말한 인문적인 훈련, 인문학적 촉수이고.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결혼을 했다면 1순위가 배우자, 2순위가 자녀다. 행복한 노후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대화’다. 부부간에 대화가 없다면 몇십억 원이 있어도 노후가 불행할 것이다. 가진 건 없어도 대화가 있다면 노후가 행복할 것이다. 대화하기 위해 지금부터 노력하지 않으면 60, 70대에는 더욱 어렵다. 지금부터 노력해서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놓아야 한다.

박웅현은 인문학 강독회를 통해, 자신만의 독법으로 창의력과 감수성을 일깨워준 책을 소개했다. 이 강독을 책으로 묶은 것이 <책은 도끼다>와 후속 격인 <다시, 책은 도끼다>이다. 그중 일부를 발췌해 소개한다.

“저는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 꽃을 잘 모르지만 <자전거 여행>을 읽고 난 이후 꽃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산수유도 사진을 보고 ‘아, 그렇구나’ 했지,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저는 김훈의 이런 글 몇 개를 읽은 다음에야 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책이나 그림, 음악 등의 인문적인 요소는 우리에게 새로운 촉수를 만들어줍니다. 김훈을 읽기 전에는 산 세월이 훨씬 긴데 산수유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처음 (책을 읽다 좋은 문장에) 줄을 치고 타이핑을 하던 게 A4 19장이었는데, 얼마 전 한 번 더 읽고 추가했더니 30장으로 늘어났습니다. 지난번에 놓친 것을 또 발견한 것이죠. 이렇게 읽을 때마다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는, 결코 가볍지 않은 책입니다. 소설은 토마스, 테레사, 사비나, 프란츠, 네 명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랑, 철학, 역사, 정치 등 소설에서 다룰 수 있는 현실의 모든 이야기를 다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책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내면과 의식을 주의 깊게 들여다본 노(老)작가의 삶의 지혜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잠언집이라 어렵지도 않고, 문맥을 따라갈 필요 없이 공감되는 문장을 하나하나 잡아나가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책이죠. 읽기는 편안하고, 살아가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는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인상파가 뭐야? 입체파가 뭐야? 도대체 그런 그림을 왜 그렸어? 궁금했는데 책의 내용을 따라가다 보니 미술사가 정리되는 것 같지요. 책을 세밀하게 보시길 부디 권합니다. 짧은 시간 동안 저의 말을 잠깐 듣는 것보다 이 책을 정독하고 나서의 기쁨이 훨씬 클 겁니다. 이 책 한 권을 읽고 나면 세계사에 대한 이해와 그 안에서 함께 흘러온 미술사에 대한 이해도 함께 생길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