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이름난 기업은 상장(上場) 기업이다. 상장 기업은 자금 조달이 쉬워지고, 인지도를 높일 수 있다. 그럼에도 굳이 상장을 거부하는 회사들이 있다. 대체로 장수(長壽) 기업이 많고, 위대한 기업도 포함돼 있다. 포브스가 선정하는 미국 비(非)상장 기업 1위인 카길은 창립 149년을 맞았고, 2위 코크 인더스트리스는 74년 됐다. 50년 전통의 오디오 기기 메이커 보스도 비상장이다.

  이들은 왜 상장하지 않는 것일까? 보스의 창업자 고(故) 아마르 G 보스의 말이 정곡을 찌른다. "우리 회사가 상장회사였다면 난 아마 열두 번은 쫓겨났을 것이다. 1980년대 5000만달러에 달하는 R&D 투자를 계속했는데도 아무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밀어붙였고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코크 인더스트리스의 찰스 G 코크 회장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상장 기업이 분기 예상 실적에 단 1페니라도 미달했다면 주식은 곤두박질 치고 만다. 결국 단기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장기적 성과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 비상장이기 때문에 장기적인 안목으로 투자를 할 수 있었다." 오죽하면 이탈리아의 와인 명가(名家) 안티노리의 사주(社主) 피에로 안티노리 후작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로 '기업 공개를 추진하며 주식을 팔았다가 나중에 몽땅 되사들인 일'을 꼽았을까? 10년 후를 내다보는 와인 사업과 주식시장의 변덕은 맞지 않았던 것이다. 시장을 무시하자거나 오너의 장기 집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길게 내다보는 눈과 시장의 변덕에 맞서는 뚝심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독일 컨설팅회사 롤랜드버거 버커드 셴커 사장의 말이 피부에 와 닿는다. 그는 "독일 중소기업의 95％는 가족 소유인데 이들에게 실적이란 '분기(分期)'가 아니라 '세대(世代)'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라며 "가족 경영인이 자기 대에 왕창 해먹고 나 몰라라 할까"라고 반문했다. 2008년 금융위기는 '자기 대(재임 기간)에 왕창 해먹는' 자본주의의 해악을 여실히 보여줬다. 그래서 요즘 구미 경영계에서는 '분기 자본주의(quarterly capitalism)'의 폐해를 반성하고 장기적인 시계(視界)를 갖는 방안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같은 이야기를 국내 정치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변덕스러운 주식시장은 포퓰리즘, 분기 자본주의는 5년 단임(單任) 정치의 은유이다. 여론은 중요하다. 하지만 여론은 때때로 주식시장의 데이 트레이더들보다 더 변덕스럽다. 국정이 그 변덕에만 휘둘린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투자자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부화뇌동파와 소신파이다. 소신파는 신호와 소음을 구별하고, 군중심리에 휩쓸리지 않으며, 10년 앞을 내다본다. 우리 정치가 본받아야 할 덕목이다.

  경영계가 분기 자본주의의 폐해를 벗어나는 방안을 연구하듯이 정치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체제를 고민해야 한다. 경영계가 주주 이익 극대화가 아니라 사회 문제 해결자로 핵심 가치를 재정의하듯이 정치도 득표 극대화와 갈등 제기자가 아니라 문제 해결자로 핵심 가치를 재정의해야 한다. 기업은 비상장을 선택할 수 있지만 우리는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 없다.

    출처 : 조선일보 2014. 10. 15일 이지훈의 경제포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