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이라는 말은 매혹적이다. 날것 그대로의 원시적인 느낌이랄까. 경남 하동에는 오래된 야생차밭이 있다. 1200년 전 지리산 산비탈에 자리 잡은 차밭은 봄이면 연둣빛 새잎을 밀어올리며 알싸한 향을 퍼뜨린다. 천년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야생차밭에서 세월의 향기를 음미해본다.

　

　◆지리산 골짜기에 점점이 박힌 푸른 차밭

　하얀 벚꽃 터널에 넋을 놓았던 걸까, 은빛 섬진강 물결에 마음을 빠뜨린 걸까. 하동에야 한두번 가본 것이 아닌데 야생차밭은 기억 어디에도 없다. 하동의 차가 유명한 것은 많은 이들이 알지만, 정작 차밭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대체 차밭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는 것일까?

　전국 차 재배면적의 25%를 차지하는 하동에서도 차가 많이 나는 곳은 화개면과 악양면이다. 그중 하동차의 60% 정도가 화개면에서 나온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방향으로 이어지는 화개골은 그야말로 ‘차밭골’로, 하동군이 선정한 ‘다원팔경’ 가운데 7경이 모두 이 골짜기에 있다.

　골짜기에 들어서자 ‘다원(茶園)’ ‘제다(製茶)’라는 이름의 간판들이 먼저 눈에 띈다. 그러나 단번에 눈에 띄는 간판들과 달리 차밭은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열어야 보인다. 꾸미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도 눈길을 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지리산에서 내려오는 화개천 물소리에 마음이 열린 것일까. 풀숲처럼 보이던 푸른 산비탈이 서서히 모자이크로 변하며 두눈에 들어온다. 크고 작은 푸른 실뭉텅이 같은 차나무들이 커다란 나무와 바위 사이에 점점이 박혀 있는 모습이라니！ 계곡과 바위, 나무가 어우러진 야생차밭의 풍경은 흔히 보던 차밭과는 달라 이색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차밭 속에는 꼬물거리는 무언가가 있다. 차를 따는 사람들이다.

　“이게 처음 딴 해차예요.”

　바위를 타고 올라가 만난 강씨(77)는 금방 딴 작은 찻잎을 보여준다. 곡우(4월20일) 전후로 딴 첫차는 ‘우전’이라 불리는 최고급 차다. 그 다음은 따는 순서대로 세작·중작·대작이라 부른다.

　“하루 종일 따봐야 4㎏이나 될까. 시집와서 따기 시작했으니 오래 됐제. 이젠 다들 늙어서 딸 사람이 없어.”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차를 따는 일은 보통 중노동이 아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마을마다 돌아가며 찻잎을 따는 ‘품앗이단’을 운영하고 있다.



　◆산비탈에서 찻잎 따며 ‘희로애락’ 천년

　하동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차를 재배한 곳으로, 쌍계사 아래에는 차 시배지가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흥덕왕 3년(828년)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대렴공이 차 종자를 가지고 오자,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신라시대에 시작된 차 재배는 불교문화와 함께 여러 지역으로 퍼졌다. 특히 이 일대는 쌍계사와 칠불사 등 사찰이 많아 차문화가 발달했으며, 하동의 차는 조선시대 후반까지 공납으로 대궐에 바쳐졌다. 덕분에 지금은 ‘왕의 녹차’로 불리며 명성을 높이고 있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아픈 역사가 숨어 있다.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는 “험준한 산중에서 간신히 따 모아 멀고 먼 서울로 등짐 져 날랐네. 이는 백성의 고혈과 살점이니…”라며 당시 차 공납의 고충을 이야기했다.

　농사는 힘들지만 야생의 환경은 명차를 만들었다. 일교차가 큰 기후, 자갈이 많고 배수가 잘되는 토양, 섬진강과 화개천이 만드는 안개는 차 재배에 맞춤이었던 것. 조선 후기 고승 초의선사는 “차나무는 바위틈에서 자란 것이 으뜸인데 화개동 차밭은 모두 골짜기와 바위틈이다”라고 말하며 야생차의 우수성을 전했다.

　또 ‘야생’은 ‘수제’로 이어졌다. 골짜기와 바위틈에 형성된 차밭에서는 기계로 작업할 수가 없어 모든 과정을 손으로 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무쇠 가마솥 덖음 기술’을 활용해 고급 수제녹차를 생산하는 제다법이 정착됐고, 이 같은 전통 차농업은 지난해 ‘국가중요농업유산(제6호)’으로 지정됐다.

　김정곤 하동차생산자협의회 사무국장은 “고급 잎차 생산량이 전체의 20% 가까이 되고, 국가에서 인증한 3대 수제차 명인도 있다”며 “친환경재배를 확대하는 등 명품차로 더욱 차별화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야생’과 ‘수제’가 농업유산을 만들다

　마지막으로 발걸음을 옮긴 곳은 하동차문화센터와 하동녹차연구소. 차 시배지 옆에 있는 차문화센터에서는 차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다례 체험과 덖음차 만들기 체험을 할 수 있다. 또 5월19~22일에는 차문화센터 일대에서 야생차문화축제도 열린다. 화개면 부춘리에 있는 하동녹차연구소는 하동차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1층 전시관에 진열된 녹차씨유·녹차화장품·녹차건강식품 등 가공품들을 찬찬히 둘러보며 다가올 천년의 시간을 가늠해보는 건 어떨까.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헤아려가면서 말이다.  

www.greentea.go.kr, 하동군청 ☎055-880-2833.

　하동=김봉아 기자, 사진=김덕영 기자 bong@nong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