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

　1993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처음 펴낸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의 말이다. ‘농촌문화유산 답사기’를 시작하며 그의 말을 빌려본다. “우리나라는 전 농촌이 박물관이다.”

　농촌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유·무형의 문화유산들이 있다. 이름하여 ‘농촌문화유산’이다. 그러나 농업이 위축되면서 농촌에 산재한 문화유산들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이번호부터 사라져 가는, 혹은 사라져 가다 다시 살아난 농촌문화유산들을 하나씩 찾아보고자 한다.



　첫 목적지는 전북 완주군 삼례읍이다. 시골 아낙처럼 순박한 이름을 지닌 삼례에는 요즘 ‘핫한’ 곳이 있다. 바로 삼례읍 후정리에 있는 ‘삼례문화예술촌’이다. 삼례로 첫 발걸음을 뗀 것은 대개의 문화유산이 지니고 있는 ‘과거’의 의미보다 ‘미래’의 의미에 더 방점을 둔 까닭이다. 양곡창고를 복합문화공간으로 부활시킨 삼례문화예술촌은 농업·농촌에 뿌리를 둔 문화유산들이 나아갈 미래를 보여준다.

　

　◆100년 전 양곡 수탈의 역사를 만나다

　칠이 벗겨진 낡은 벽, 녹슨 철망이 쳐진 창, 빛바랜 육중한 철문…. 삼례문화예술촌에 들어서면 오래된 건물들이 먼저 옛이야기를 꺼낸다. 100년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일제시대 양곡창고들이다.

　“일본인 대지주 시라세이가 1926년 설립한 이엽사농장의 양곡창고로 추정됩니다. 만경강 상류에 위치한 삼례지역은 군산·익산·김제와 함께 일제시대 양곡 수탈의 중심지였습니다. 만경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군산항을 통해 반출하기 전에 보관하던 창고였지요.”

　문성준 문화관광해설사(62)의 얘기다. 과거 삼례는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으로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러나 1914년 삼례역이 생기면서 일제는 철도를 이용해 양곡을 수탈했고, 양곡창고는 수탈의 기지가 됐다.

　삼례문화예술촌에 있는 창고 6동과 관사 1동은 옛 모습이 잘 보존돼 등록문화재 제580호로 지정됐다. 입구의 인포메이션센터는 창고 관리인이 살던 관사로, 일본식 전통가옥의 형태가 남아 있다. 총 건축면적은 2497㎡(755평), 대지면적은 1만1825㎡(3577평)에 이른다니 일본의 양곡 수탈 규모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쌀 대신 예술작품들이 가득한 창고

　외관과 달리 창고의 내부는 현대적인 분위기다. 6동의 창고에 문화예술 분야의 여러 전문가들이 저마다의 색깔을 입힌 것. 예술촌은 각 공간의 대표들로 구성된 ‘삼삼예예미미협동조합’이 완주군의 위탁을 받아 운영하고 있다.

　인포메이션센터 맞은편의 ‘비주얼미디어아트미술관’에는 빛을 이용한 미디어아트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김경태 학예실장은 “미술에 영상매체를 접목한 미디어아트는 최근 현대미술의 추세”라며 “양곡창고라는 옛 건물에서 가장 현대적인 장르를 선보임으로써 과거와 현재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책박물관’에는 한국 북디자인 100년, 철수와 영이 교과서 그림 등이 전시돼 있고, 헌책을 살 수 있는 무인서점도 운영된다. 또 인쇄기계들이 전시된 ‘책공방북아트센터’에서는 책 만들기 체험도 할 수 있다. 전통 목가구와 연장들이 가득한 ‘김상림목공소’는 짙은 나무향이 매력적이며, ‘디자인박물관’과 ‘문화카페’도 쉬엄쉬엄 둘러보기 좋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천장이 높은 창고 건물은 미술관·박물관·목공소·카페 등 어떤 공간과도 잘 어울린다는 점이다. 또 과거 습기를 막기 위해 빗살 모양으로 덧댄 내벽의 목재와 천장의 트러스 구조는 인테리어 효과까지 드러낸다. 과거가 현재를 더욱 빛내주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만남은 계속된다

　양곡창고가 삼례문화예술촌으로 다시 태어난 것은 2013년. 1970년대부터 삼례농협의 양곡창고로 사용되던 것을 2010년 완주군이 매입했다.

　“과거에는 포대로 쌀을 수매해 쌓아뒀기 때문에 큰 창고가 필요했어요. 그러나 톤백으로 수매방식이 바뀌고 전라선 복선화로 삼례역이 옮겨가면서 양곡창고의 기능이 약화됐지요. 양곡창고를 통해 농업의 변천사도 짚어볼 수 있습니다.”

　김종구 삼례농협 지도팀장의 설명이다. 농협에서 사용한 역사는 건축물에 또 다른 무늬를 남겼다. 빛바랜 농협 마크와 외벽에 적힌 ‘협동생산 공동판매’ 문구는 1970~1980년대 농촌의 모습을 보여준다.

　매년 4만여명이 찾는 예술촌은 이제 완주의 명소가 됐다. 완주군에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예술촌 옆 비료창고를 책마을문화센터로 리모델링하고 로컬푸드 전시·판매장도 만들 계획이다. 낡은 창고에서 시작된 시골마을의 변화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자못 기대된다.

　개관 오전 10시~오후 6시(월요일 휴관), www.srartvil.kr ☎070-8915-8121.

　완주=김봉아 기자, 사진=김덕영 기자 bong@nongmin.com